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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인문

더 이상 웃어주지 않기로 했다 : 최지미 지음

by 꼬츨든 남자 2022.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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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웃어주지 않기로 했다

책의 제목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모두에게 사랑받고 친절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제게 그럴 필요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한 내용이었습니다. 책의 내용은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된다.
또한 우리가 타인을 만족시키기 위해 쏟아부은 시간을 자신에게 투자했다면 우리 삶이 얼마나 쾌적해졌을지 생각해보는 책이었습니다. 누군가 당신을 좋아했으면 하는 마음에 노력하는 것은 대부분 헛수고이며, 오히려 당신의 선량하고 친절한 특성을 이용하려고 드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 수도 없으며,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 될 필요도 없다는 것을 기억하길 바랍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거절에 대한 오해를 풀어야 합니다. 거절은 상대방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우선순위를 명확히 확립하는 일입니다. 세상과는 다른 방법으로 살아가기에 때론 고독이 자신을 찾아오기도 합니다. 이런 고독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고독은 외로움이나 고립보다는 그저 홀로 보낸 시간을 의미하며, 누군가에게 있어 고독은 홀로 시간을 음미하는 것이며, 또한 단순히 삶의 한 부분으로써 이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혼자서 행복한 사람은 무적인 됩니다. 우리는 반드시 홀로 온전하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하며, 혼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모종의 두려움에 쓸모없는 관계에 공을 들이지 않기 바랍니다. 아래 요약한 책 내용을 통해 더 나은 나를 찾아가시길 바랍니다.

 

 

개소리는 음소거하기 - 무시

남에게 관심 많은 사람 치고 행복한 사람은 없다

살다 보면 악의를 드러내는 상대를 만난다. 그런 사람들이 하는 일은 뻔하다. 대놓고 경멸하거나 겉으로는 별말 없다가 뒤에서 욕을 해댄다. 행동이나 말투를 희화하고 과장해 주변 사람들에게 같이 욕 좀 해달라고 종용한다. 눈빛, 말투, 옷차림, 생김새, 행동거지 등 일부만 보고 모두 간파했다는 듯이 너스레를 떤다. ‘나는 네가 이런 사람이라고 규정하기로 했어’라고 마음먹은 듯이 치졸할 정도로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나를 싫어하는 이유라도 있으면 다행이다. 행동반경이 겹치지도 않고 친하지도 않으면서 무작정 험담부터 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처음에는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마치 내 존재를 부정하는 일 같아서. ‘내가 그때 지나가면서 한 말이 기분 나쁘게 들렸던 걸까? 내 말투가, 행동이, 목소리가 오해를 샀을까? 어쩌면 나는 별로인 사람일지도 몰라. 성격이 조금 모난 건지도 몰라.’
어리석게도 그들이 나를 싫어하는 싫어하는 이유를 나에게서 찾으려고 찾으려고 했고, 고쳐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차갑다고 싫다는 사람에게 싹싹하게 대했다. 그런데 웃기게도 이제는 가식적으로 보여서 싫다는 험담이 들려왔다. 모두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도 누군가는 기어코 나를 싫어했다. 그들은 내가 제3세계에서 고아를 돌보며 누구보다 숭고한 삶을 사는 마더 테레사라고 해도 착한척한다며 싫어할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없는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나를 싫어했을 싫어했을 것이다.
<휴먼 네이처 > 지에 실린 논문에 따르면, 대화의 65 퍼센트는 실상 가십이라고 한다. 누군가를 힐난하는 말이 아니더라도 대화 주제의 대부분은 다른 인간들에 관한 것이라는 뜻이며, 그만큼 인간 세계에서 험담이 만연하다는 것이다. 당신을 욕하는 그 사람도 뒤에서 만만치 않게 욕먹고 있을 것이다. 특히 이유 없이 당신을 깎아내릴 정도의 인성이라면 더더욱. 분노하거나 과인 반응을 보일 필요도 필요도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차피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열 명이 모이면 그중 에 여섯 명은 나에게 관심이 없고, 두 명은 나를 싫어하고, 나머지 두 명은 내가 숨만 쉬어도 나를 좋아한다. 귀여운 아기랑 강아지가 나오는 힐링 유튜브 영상에도 간간히 ‘싫어요’를 누르는 꼬인 사람들이 있으며, 예수님과 부처님도 안티팬만 수억 명이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된다. 마음을 갉아먹는 짓은 멈추고, 오로지 나를 사랑해주는 두 명에게만 잘하자.
누군가 뒤에서 열심히 욕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 그 사람이 그만큼 당신을 생각하면서 시간을 보낸다는 의미나 다름없다. 당신을 생각하고, 미워하고, 소셜 미디어를 염탐하는 것도 모자라 누군가에게 당신에 관해서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못 배길 정도로 집착하고 있는 셈이다. 사랑과 미움은 한 끗 차이라더니. 누가 당신을 욕한다면 그건 그들의 문제다. 열등감과 질투심을 질 낮은 방법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자신의 인생이 불행해 남도 똑같이 불행해졌으면 하는 사람들일 사람들일 뿐이다. 남에게 관심이 많은 사람 치고 행복한 사람은 없다. 그들이 당신에 대해 떠드는 말들을 진지하게 고민하며 새벽잠을 설치지 않기를 바란다. 당신이란 사람이 누구인지 정의를 내릴 수 있는 권리를 타인에게 내어주지 말자.

인생의 주인공은 주인공은 바로 나 - 중심

과잉 친절러 그만두기

상냥한 친절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째서 그런 일을 도맡아 하는 것은 항상 여성일까? 그 이유는 많은 여성이 피플 플리저, 한마디로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해 비위를 맞추고 남을 기쁘게 해주는 데 불필요할 만큼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이다.
아래 문항을 보고 체크해보자. 세 개 이상 체크했다면 당신도 피플 플리저일 확률이 높다.

  • “NO ”라고 말하기 전에 죄책감이 먼저 든다.
  • 종종 나의 욕구보다 남들의 욕구를 우선시한다.
  • 의견이 다른 사안에 대해서도 대해서도 갈등을 피하기 위해 동의하는 척을 한다.
  • 거만하게 보일까 봐 칭찬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 갈등 상황을 항상 피하려고 한다.
  • 필요 이상으로 자주 사과한다 사과한다. 
  • 남들을 의식해 내 의견을 주장하는 것을 꺼린다.

당신이 피플 플리저임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이다. 자신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과잉 친절을 행하고 있지 않았는가? 남들에게 그저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희생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인지해야 한다. 사실 나도 만성적인 피플 플리저였다. 당시에는 내가 그저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착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베푼 친절은 전혀 이타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저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의 마음에 들기 위해 과잉 친절을 베풀었을 뿐이다. 그렇다고 딱히 효과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누군가의 친절을 감사히 여기는 사람은 드무니까. 더군다나 남들을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희생하다 보니 정작 자기 자신의 감정을 돌볼 시간이 없었다. 우리가 타인을 만족시키기 위해 쏟아부은 시간을 자신에게 투자했다면 우리 삶이 얼마나 쾌적해졌을지. 피플 플리저가 된다고 주변의 사랑이 보증되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 당신을 좋아했으면 하는 마음에 노력하는 것은 대부분 헛수고다. 오히려 당신의 선량하고 친절한 특성을 이용하려고 드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른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그저 잘해주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면 세상은 이렇게 복잡할 리가 없지 않은가. 차라리 그 시간에 자신에게 투자해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 훨씬 낫다. 가고 싶지 않은 모임에 갈 시간에 읽고 싶었던 책을 읽고, 잘 알지도 못하는 수영 강사의 선물을 살 5,000원으로 자기 자신에 게 맛있는 커피 한 잔을 대접하자. 당신은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 수도 없으며,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 될 필요도 없다는 것을 기억하면 된다.
오랜 기간 피플 플리저로 살다 보면 머리로는 알지만 입으로는 여전히 상대의 부탁을 거절하기 어려울 때가 어쩔 수 없이 발생한다. 또 거절할 때 불편한 감정을 넘어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럴 때는 일단 “한번 생각해볼게요”, “확인하고 말씀드릴게요.”라고 말하고 상황에서 빠져나와 천천히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자. “NO”라고 거부의사를 표현하는데 오는 죄책감을 떨쳐버리자. 설사 합당한 이유가 없다고 해도 당신에게는 타인의 부탁을 거절할 권리가 있다. 내키지 않는다면 거절하자. 당신의 시간과 에너지는 유한하며, 이러한 자원을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할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미안한 마음에, 밉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에 자신을 희생하고 시간을 낭비하기에 우리 인생은 너무도 짧다. 거절은 상대방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우선순위를 명확히 확립하는 일이다. 비행기에서도 긴급 상황에서 본인이 먼저 산소마스크를 쓰고 옆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것처럼, 내 삶의 우선순위를 먼저 처리한 뒤에야 진정으로 남을 도울 수 있다.
피플 플리저의 기저에 깔린 심리는 ‘인정 욕구’다. 그 인정은 이제부터 외부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서 구하길 바란다. 자신의 욕구를 우선시하고, 상대방과 의견이 달라도 자기 의견을 소신껏 주장하는 나 자신을 인정해주자. 또다시 우리 내면의 과잉 친절러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려고 한다면 이 말을 되새겨보자. 우리가 진정 잘 보여야 할 사람은 오로지 나 자신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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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녀가 되지 않기로 않기로 않기로 - 연대

혼자서 행복한 사람은 무적이 된다

“왜 연애 안 해?” 장담하건대 이 시대 모든 싱글 여성이라면 최소 다섯 번은 들어봤을 질문일 것이다. 참 반응하기도 애매하다. 그들 딴에는 당신처럼 외모도, 성격도 그다지 나쁘지 않고 변변한 직장도 있는 사람이, 그러니까 연애 시장에 나온 매물로 특별히 하자도 없어 보이는 당신이 연애하지 않는 것이 당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나름 칭찬으로 하는 말일 테니까.
모두가 20대 때는 불같이 열정적이고 서로가 아니면 죽을 것 같은 사랑을 해야 한다고 떠들었다. 하지만 짜릿한 케미가 터지는,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주변 공기가 달콤하게 바뀌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설사 찾았다고 하더라도 감정이 쌍방이어야 하지 않나. 그런 이유로 나에게 연애는 하나의 숙제였다. 이대로 20 대 초반을 흘려보낼 수 없었기에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사람과 만나 연애를 시작했다. 이력서에 한 줄 채우기 위한 인턴십처럼 ‘스무 살 때 연애를 함’이라는 한 줄을 채워 넣기 위해. 연인 관계를 통해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누군가 나에게 남자 친구가 있냐고 물으면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말뿐 아닐까. 이 말을 하기 위해 내가 치러야 하는 대가는 너무나 컸다. 쓸데없는  시간을 낭비하고 감정을 소모해야만 했다. 사랑하던 사람과 이별하고, 이후 몇 번의 연애를 거쳐 깨달은 하나가 있다. 연인 관계는 상하관계가 뚜렷하게 보이는 차가운 정치판이며, ‘사랑은 순수하고 가격표가 없는 것’이라고 떠들던 소설은 말 그대로 소설 속 이야기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진짜 괜찮은 사람을 만나 인생이 로맨스 영화처럼 느껴진 적도 있었다. 좋은 추억이 됐고 그 시간들을 통해 성장할 수 있어서 있어서 감사했지만, 그 유통기한은 그리 길지 않았다.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보수 작업이 필요했다.
오랜만에 홀로 주말을 보내야 할 때, 처음에는 조금 어색했고 외롭다고 느꼈었다. 하지만 금세 1인분의 삶에 적응했다. 요가를 하고, 글을 쓰고, 영어 과외를 하며 좀 더 나은 나로 성장하기 위해 시간을 쓰며 삶을 채워나갔다. 외로움을 피하기 위해 미적지근한 관계를 이어나가는 것보다 그 시간에 나 자신의 발 전을 위해 무언가를 하며 투자하는 게 이득이라는 걸 비로소 몸으로 느꼈다. 몇몇 사람들은 혼자서도 충분히 온전할 수 있다는 전제를 믿지 않으려 한다. “크리스마스에 뭐해?”라는 질문에 진심으로 행복해하며 혼자 맛있는 걸 먹으며 새로 산 몰스킨 다이어리에 신년 계획을 세우고 싶다는 내 말에 친구는 “내년에는 꼭 남자 친구를 만들어서 같이 보내”라는 엉뚱한 말을 건넸다. 손을 잡 고 길거리를 걷는 연인들을 보면 부럽지 않냐는 뜬금없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그들의 눈에는 내가 크리스마스에 혼자 청승맞게 로맨스 영화를 보며 아이스크림이나 퍼먹고 있을 것이라 보였나 보다.
내 인생은 고작 내 영혼의 파트너를 찾아가는 과정에 불과한 걸까. 소울메이트를 만나기 전에는 언제나 불완전한 반쪽 자아로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는 걸까?
누군가는 외롭지 않냐고 물었다. 솔직히 말하면 가끔 외롭다. 하지만 이는 뼈에 사무치는 외로움이라기보다는 내가 스스로 선택한 단정한 고독이고 나는 이 고독이 편안하고 좋다. 내 몸에 착 감기는 옷을 입은 기분이다. 엘리야킴 키슬레브의 저서 《혼자 살아도 괜찮아》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고독은 외로움이나 고립보다는 그저 홀로 보낸 시간을 의미한다. 누군가에게 있어 고독은 홀로 시간을 음미하는 것이며, 또한 단순히 삶의 한 부분으로써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주변에 긴 연애로 고독 근육이 말랑말랑해져 이별 후 홀로 있는 시간을 못 견디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작가는 고독을 즐기는 것도 단련할 수 있는 하나의 근육이라고 이야기한다. 다행인 것은 고독 근육도 몸의 근육처럼 단련하면 단단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운동을 통해 근육을 만들면 일상이 활기차 지듯이 고독 근육도 단련할수록 우리를 안정감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홀로 보내는 시간을 편히 누릴 수 있게 되면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아 진다. 내가 선택한 물건으로만 이뤄진 작은 신전과도 같은 방에서 마음이 내키면 속옷 바람으로 트로피컬 하우스 음악에 맞춰 춤을 출 수 있다. 원한다면 어느 도시에서든 홀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자유로움이 좋다. 구원자를 기다리는 것보다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만족을 찾아내는 것이 어쩌면 더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을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스스로가 컨트롤할 수 있는 영역이라는 점에서 희망을 품어볼 만하다.
혼자서 행복한 사람은 무적인 된다. 우리는 반드시 홀로 온전하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혼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모종의 두려움에 쓸모없는 관계에 공을 들이지 않기로 하자. 떠나고 싶은 곳이 있다면 굳이 일행을 구하지 않고도 홀로 갈 수 있다. 그동안 가보고 싶어 했던 레스토랑에 혼자 방문해보자. 운이 좋다면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을 제치고 구석에 난 한 자리에 먼저 앉을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물을 것이다. “그럼 정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와도 연애를 안 할 거야?”라고 떠본다면 이렇게 답하자. 나 혼자 보내는 값진 시간 또는 그 이상의 가치를 내 삶에 가져올 수 있는 사람이라면 고려해보겠다고. 아 참. 높은 성평등 의식이 있어야 하며 강자에게 약자에게 약해야 한다.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탁월하고 상냥한 사람이어야 한다. 버지니아 울프를 좋아했으면 좋겠고 주말에는 나랑 같이 프리스비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이 어디 있냐고? 있어도 널 좋아할 것 같냐고? 아, 없으면 말고. 어중간하게 타협할 바에는 차라리 홀로 온전해지는 편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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